프랑스의 식민지_뉴프랑스의 설립과 성장이야기~
1. 첫 식민지
- 포트 로열 : 샹플랭이 캐나다 땅에 최초로 영구적인 정착지를 세운 곳, 아카디아라고 부름
- 1606년 몽트의 모피 독점 거래 특허권이 취소된 후, 포트로열 포기, 4년간 포트로열에 아무도 살지 않음
- 1610년 비앙쿠르 : 원주민과 포트로열에서 교역시작
- 1613년 사무엘 알갈이 지휘하는 영국 기습대가 쳐들어와 프랑스 인들 공격했으나, 실패
2. 프랑스 식민지 아카디아
- 아카디아의 주민들 : 프랑스의 도시 빈민들과 제대군인들 -> 농사 경험이 없음
- 믹맥족의 도움 : 사냥법, 자작나무 껍질로 카누만드는 법등을 가르침
- 1650년 인구가 급속히 증가 -> 펀디만까지 영역 확장
-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수문을 내고, 농사를 지음 - 강낭콩, 양배추, 순무등 키움
3. 영국 식민지와 아카디아
- 영국 : 아카디아 남쪽에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를 세움 ->
- 프랑스의 아카디아보다 훨씬 빨리 성장
이유 :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뉴잉글랜드로 이주해 옴
조선업과 일용품 생산업체들 들어섬
영국 본토와 카리브 해로부터 상선들이 정기적으로 보스턴 등의 항구에 들어옴
* 아카디아 인들과 뉴잉글랜드와의 교역
- 아카디아인은 가축과 밀, 모피를 제공하고, 뉴잉글랜드에서 가져온 당밀이나 브랜디, 설탕과 교환
- 아카디아인들은 프랑스 정부의 무관심으로 배신감을 느낌
- 영국과 프랑스의 불화
- 노바스코샤,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, 뉴브런지윅을 서로 자신들의 식민지라고 우기며 불화 시작
- 1621년 영국 왕 제임스 1세 는 알렉산더 경에게 아카디아 하사 -> 노바스코샤로 명명, 아들에게 식민지를 세우게 하였으나, 실패
4. 아카디아와 영, 불간의 갈등
-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 심화 - 아카디아가 북미대륙의 교두보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
- 영국 : 뉴펀들랜드에 정착기지 건설, 황금어장인 그랜드 뱅크에서 대구잡이 장악
- 프랑스 :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에 정착기지 건설, 원주민들과의 모피교역 장악
--> but! 아카디아를 먼저 손에 넣는 쪽이 세인트 로렌스강과 모피교역, 그랜드 뱅크의 대구잡이 어장까지 장악 가능
---> 영프 간 100년간 전투 --> 이후 오늘날의 캐나다안의 영프 갈등으로 이어짐
- 원주민들의 가담
- 동부삼림지방의 이로쿼이 부족 동맹 : 영국 편에 가담
- 휴런과 믹맥족 : 프랑스 편에 가담
- 1713년 위트레흐트 평화조약 체결
- 프랑스 : 영국에 허드스만, 뉴펀들랜드, 아카디아까지 내주게 됨
- 영국의 지해하에 들어간 후에도 프랑스 인들은 펀디만 연안에 그대로 남았다.
* 아카디아 *
북미대륙의 다른 어떤 프랑스 식민지보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졌고, 원주민과의 모피교역도 활발했으며, 천연의 좋은 항구들과 비옥한 농토, 아름다운 원시림 및 탄광까지 갖추었으며, 온화한 기후에 세계 최대 대구잡이 황금어장을 가까이 둔 지역.
5. 영국의 통치와 추방령
- 프랑스 : 케이프 브래턴 섬에 군항 축조 후 이름을 루이스 버그라고 명명 (프랑스 왕 이름을 땀)
- 뉴펀들랜드의 프랑스 정착민들을 루이스버그로 이주 시킨 후, 본국에서 군대 주둔
- 아카디아 : 중립파 프랑스인들이 생겨남 (전쟁이 일어나면 어느편에서 서지 않을 것이라 약속함)
- 노바스코샤 (아카디아) : 영국군 주둔, 1749년 핼리팩스에 군시설과 해군기지 건설, 2500명 이주
- 프랑스편이었던 믹맥족이 핼리팩스 기습, 다트머스 제재소 짓던 영국인들 살해사건 발생
--> 영국군의 복수 : 믹맥족이나 아카디아인의 머리가죽을 벗겨오면 현상금 지급
--> 외국인 개신교도들 (독일, 스위스계, 네덜란드 개신교도들), 프랑스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지방 개신교도들 이주 (1750 년 ~1753년 독일인 대거 영입, 지금 루넨버그 지방에 정착, 19세기까지 독일어 통용)
- 프랑스 카톨릭교도와 영국 개신교도들의 종교적 마찰 로 불안 고조
--> 1755년 프랑스계 아카디아인들에게 영국 국왕에 대한 충성의 맹세 강요 -> 거절 -> 추방령
-> 대부분 배에서 죽고, 이산가족이 됨, 살아남은 사람들은 영국 식민지 루이지애나까지 실려감
> 펀디만 유역의 기름진 땅을 영국인, 스코틀랜드 인, 독일인 이주자들이 차지
퀘백6. 샹플랭과 뉴프랑스
- 1608년 샹플랭과 몽트는 스타다코나에 정착 (지금의 퀘백시)
- 뉴프랑스의 수도이자 방어진지의 역할을 해냄.
- 1615년 샹플랭은 휴런족과 동맹 -> 서쪽으로 진출 -> 이로쿼이족에게 총 발사 후, 숙적이 됨
- 그 이후에도 원주민들의 땅을 탐사 : 브뤼레, 니콜레 - 원주민과 함께 생활
- 1678년 라살 - 미시시피강을 타고 내려갔다가 중국 대신 멕시코만에 도착 -> 그 지역 땅을 루이 14세의 소유라 선포한 후 루이지애나라고 명명
- 모피를 구하기 위한 서쪽으로의 진출 : 뉴프랑스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자산 인 모피를 구하기 위함
- 숲속의 장돌뱅이 : 카누를 타고 원주민들과 교역 -> 도시 농촌의 젊은이들이 가세 -> 프랑스는 모피교역소 설립
7. 뉴프랑스의 성장
- 프랑스 내 분쟁으로 뉴프랑스의 인구는 20년 동안 80명 정착
- 1628년 일백조합상사라는 홰ㅣ사와 계약을 맺고, 뉴프랑스 식민지 양도, 정착민을 보내는 조건으로 모피 특허권을 줌
--> 400명의 이주민을 실은 배를 영국기를 단 배가 기습해 이주민 납치 --> 선장 커크 형제는 이듬해 다시 퀘벡에 상륙해 항복을 요구 --> 커크 형제에게 퀘벡 을 내줌 --> 3년간 영국 통치 --> 조약에 의해 다시 프랑스로 귀환
- 30년간 일백조합상사는 이주민들을 이주시키고, 세인트 로렌스 강 유역에 농사를 짓게 함,
- 1663년 프랑스가 뉴프랑스를 돌려받고, 뉴프랑스 다스릴 세 사람 임명
* 총독 : 프롱트나크 백작 (군인 출신) - 국왕의 명령을 전달, 식민지 방위, 법을 다스리는 것이 임무
* 주교 : 라발, 교회, 병원, 학교를 책임지는 것이 임무
* 집정관 : 타롱, 모피 거래와 수출입 업무, 및 정착민의 유치, 식민지 번영에 책임을 짐
--> 독신자와의 결혼주선, 이주후 땅 제공 등으로 인구가 들어 1675년 8천명에 이름 , 100년간 번창
- 영주제도
- 1663년 세이녜르 라 불리는 지주들에게 식민지를 맡김
- 지주들의 고민 : 이주민을 계속해서 지원받기 힘들었고, 소작인들이 멀리 떨어져 있어, 이뤄쿼이 족의 공격에 속수무책
- 뉴프랑스와 가톨릭교
- 리코레트 선교회가 가장 먼저 도착
- 예수회 :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내륙 깊숙히 들어갔으나,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버리지 않음
- 맨스 : 몬트리올에 병원을 세움
- 수녀 :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하며, 환자 돌보거나, 원주민 여성들의 교육 담당
- 이로쿼이 족의 공격
- 이로쿼이족은 네덜란드인 및 영국인들과 동맹을 맺고 총과 탄약을 공급받음
- 1640년 전염병으로 휴런족 절반이 죽고, 이로쿼이 족의 기습을 받아 대부분 흩어짐
- 1649년 휴런족 지역의 생트마리가 이로쿼이족의 기습을 받아 불타고, 프랑스 사제들이 많이 사망
- 1660년 몬트리올을 공격하기 위해 오타와 강의 롱 솔트에 도착 - 오르뮤 프랑스 인들과 휴런족의 결사적 방어 - 대부분의 휴런족과 프랑스인 사망 했으나, 몬트리올 공격은 들통나 포기하게 됨
- 그 이후로도 수십년간 이로쿼이 족이 뉴 프랑스 공격, 프랑스인들을 죽임
퀘벡- 퀘백의 서민사회
- 1690년 뉴프랑스의 중심도시가 된 퀘백 - 총독관저, 정치지도자, 종교지도자들, 군인, 상인, 기술공, 노동자 들의 도시
- 1700년 퀘백시의 인구는 2천명을 넘음, 퀘백에서 몬트리올까지 배가 왕래,퀘백에서 시작, 트루아 리비에르 와 몬트리올 순으로 정기적 모피장이 슴. 프랑스 상인들은 주로 총기류와 가정에서 쓰는 가재도구와 술을 모피와 교환
- 부둣가의 아랫마을 : 노동자와 기술공들 거주, 목수, 석수, 대장장이, 점원, 재봉사, 하인 등의 하층계급 사람들이 거주
- 검은 돌로 집을 짓고, 지붕을 짚으로 이어, 항상 화재의 위험이 도사림 - > 굴뚝 소제와 집안 청결에 힘씀
- 텃밭을 일구고, 채소를 가꾸었고,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해 가축을 기름, 기술공들은 집에 가게를 꾸미기도 함.
- 퀘백의 상류사회
- 윗마을 건물 : 상류층, 석공들이 지은 석조건물로, 정치지도자, 종교지도자들이 거주, 집무하는 곳
뾰족하고 높은 종탑이 솟아있는 대성당이 중앙에 자리잡음
- 광장 맞은 편에는 주교의 관저 위치, 신학교와 사제들 및 선교사들이 수련하는 수도원이 위치
* 라발 - 보프레와 오를레앙 섬에 영지 소유
- 총독관저 : 세인트 로렌스 강과 도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위쪽에 자리잡음. 생 루이성이라 부름
- 흑인 노예 : 1620년부터 흑인 노예를 들여옴
- 화려한 주교나 신부들의 생활과는 대조적으로 선교사들은 검소하고 고된 일에 시달림.
- 퀘백의 번영과 몬트리올, 트루아 리비에르의 성장 '
- 17세기 말 부터 몬트리올에 상업의 주도권을 빼앗김 : 원래 선교지로 시작되었던 몬트리올은 모피교역의 중심지 가 됨
- 트루아 리비에르 :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카누를 제작하는 중요한 도시로 성장함.
- 뉴프랑스의 농촌생활
- 소작인 : 남자는 아침부터 농사일, 여자는 아이들을 돌보며, 공동화덕에서 빵을 굽고, 텃밭의 채소도 가꿈
- 곡물과 푸성귀, 물고기, 쇠고기 돼지고기, 닭고기 등을 먹었으나, 당시 감자는 돼지 먹이로 여겨 먹지 않음
- 농촌을 마을단위로 나누어 교구라고 부름, 교구마다 교구신부가 있어서 예배를 인도하고, 결혼식, 세례식, 장례식등 마을의 중요한 행사를 돌봄
- 육로가 없어 수로를 이용, 겨울에는 썰매 이용
- 자급자족 생활을 하였고, 설탕이나 양렴류는 도시에서 구입
- 지주를 위해 몇일간 일해야 했고, 농장에서 재배한 것을 지주에게 조금씩 바침 - 양이 많지 않아, 오랜만에 마을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시간을 보내는 시간으로 생각함.
8. 허드슨 베이 컴퍼니
- 1610년 북서항로에 도전했던 허드슨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 후, 50년간 탐험 포기
- 라디송과 그로세이예르(프랑스인) : 세인트 로렌스를 출발해서 육로로 허드슨 만까지 가려 하였으나, 실패했다 but, 많은 모피 수확 -> 뉴프랑스 총독은 허가를 받지 않고 모피 교역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 시킴 -> 풀려난 후 영국 국황을 설득하여 재정 확보 -> 허드슨만에 도착해 많은 모피를 수집해 영국으로 돌아감 -> 허드슨 만에 모피 교역소를 차리기로 결정하고 호드슨 베이 컴퍼니라는 회사 설립 --> 영국 국왕은 1670년 모피 전매권을 허드슨 베이 컴퍼니에게 일임 --> 프랑스가 내륙에서 모피 거래하는 것을 보고, 영국도 내륙에 교역소 설치 -> 영국은 프랑스인들로 인해 캐나다 북부 장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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